오랫동안 달리고 싶은 창작자에게, 박재광

[창작자와의 인터뷰] 박재광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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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min readMar 17, 2022

“유명해지고 싶고 돈도 잘 벌고 싶지만, 결국에는 오래 하고 싶어요. 일생일업( 一生一業 )이라고 생각하면서, 계속 성장해 나갔으면 좋겠어요.”
프랑스에서 데뷔한 프로 작가 박재광은 ‘DC 코믹스가 사랑하는 만화가가 아닌가?’라는 물음에 손사래를 치며 자신은 아직 부족하다고 말한다. 올해로 4년 째 인체드로잉을 강의하는 박재광 작가의 수업은 항상 즐거우면서도 학생들의 목표를 함께 하고자하는 진지한 분위기가 흐른다. 학생들에게 우리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즐겁게 오래 그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바르게 앉아서 그리라는 말을 덧붙이며.

박재광 작가님!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슈퍼애니 소속 작가 박재광입니다. 프랑스, 미국 등 해외 출판 만화를 중심으로 KBS 한글날 특집 <방탄_때문에_한글_배웠다> 라이브 드로잉, <2022년 청와대 신년 연하장 일러스트>, 롯데월드타워 <상전 신격호 기념관 >일러스트 등 국내에서는 라이브드로잉, 일러스트, 광고, 콘티 등 ‘이야기’ 가 필요한 다양한 그림 작업을 모두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트폴리오 아카데미에서 ‘인체 드로잉’ 강의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배트맨 더 월드>에 참여한 박재광 작가의 그림 원화

최근 <배트맨 더 월드> 작업으로 한층 더 유명해지셨는데,
DC 코믹스와 연이 닿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2021년은 배트맨 80주년이었는데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4개 국가의 작가들이 배트맨 단편 만화를 그린 DC 코믹스의 <배트맨 더 월드>라는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국내 DC코믹스와 독점 계약 출판사 <시공사>와 다른 프로젝트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위 작업을 제안해주셨고, 감사하게도 제가 한국 작가로 참여하게 된 것이고요.

제가 매우 큰 작업을 한 것처럼 알고 계시는데, 단편 만화라서 작업의 규모가 큰 편이 아니라 부끄럽기도 합니다. 사실 더 큰 프로젝트를 논의하고 있는데, 기대해주세요!

작가님의 스타일이나 실력이 모든 방면에서 부합했기 때문에 DC 코믹스와 연이 닿은 게 아닐까요? 작업 후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배트맨을 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굉장히 즐거웠죠. 외국에서 활동하는 작가에게도 배트맨이라는 캐릭터는 굉장히 상징적이거든요. 그만큼 더 어려웠던 점도 있는데요, 대부분의 사람이 배트맨을 잘 알기 때문에 제가 조금만 잘못하면 다 알 수 있으니까요. 배트맨의 분위기나 비주얼적인 측면에서 고민이 많았고,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스러운 면도 있었어요.

워낙 유명한 캐릭터라 부담되는 부분도 있었겠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트맨 이후로 혹시 그려보고 싶은 캐릭터가 있다면요?

DC 코믹스에서는 배트맨이 언제나 1순위였고요. 마블에서는 스파이더맨과 헐크를 좋아해서 언젠가는 꼭 한번 작업해보고 싶어요. 상반되는 체형 때문일 수도 있고, 그 두 캐릭터를 좋아해요.

저는 욕심이 되게 많아서 히어로 만화뿐만 아니라 그림으로 해보고 싶은 게 많아요. 전시, 의류 협업도 해보고 싶어요. 배트맨 덕분에 알려지긴 했지만, 데뷔작인 프랑스 만화를 계속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박재광 작가가 데뷔한 프랑스출판사 Glénat Editions의 장편만화 Conan

프랑스 출판사를 통해 데뷔했다는 점이 굉장히 독보적인 것 같은데요?

독보적인 커리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좀 희귀한 케이스죠. 국내에서는 프랑스에서 데뷔하는 정식적인 루트가 없으니까요. 운이 좋았습니다.
제가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 학과 출신인데, 재학 당시에 웹툰이 뜨고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수작업을 좋아했고, 디지털 작업은 잘 못 했고요. 만화는 하고 싶었지만, 웹툰은 잘 맞는지 모르겠고, 막막했죠.

그때 슈퍼애니 소속 대표 작가이신 김정기 작가님이 대외적으로 유명해져서 해외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 하셨던 시절이었는데요, 선생님께서 두 번째 프랑스 출장을 가게 되었을 때, “선생님! 제가 일 도와드릴 테니까 그냥 따라다니게만 해주세요!”라고 부탁드려서 모아둔 돈을 다 챙겨 김정기 선생님의 투어를 따라다니며 프랑스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어요.

프랑스 투어요? 전국을 순회하는 건가요?

프랑스는 1년 내내 전국에서 만화 축제를 해요. 가수들이 지방 투어를 순회하는 것처럼 프랑스에서는 만화 작가들도 그렇게 해요. 각 도시에서 유명한 만화작가를 초대하는 거죠. 김정기 선생님을 초대해서 따라간 거였는데, 충격적일 정도로 멋있었어요. 일단은 유럽, 프랑스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도 멋있었지만, 멋진 석상과 분수가 있는 거리에서 만화 축제를 하는 거예요.

프랑스는 땡땡의 모험, 설국열차, 아스테릭스 등 유명한 만화가 탄생한 만화 강대국으로 알고 있어요. 어찌 보면 만화 축제를 여는 것도 당연하네요.

네. 일단 전 세계가 아는 예술 강대국이고, 만화를 제9의 예술이라고 칭할 정도로 예술로서 굉장히 가치를 높게 평가합니다. 그리고 만화 소비도 굉장히 활발한 편이라 세계 3대 만화 축제 중에 프랑스 앙굴렘 만화 축제가 포함될 정도입니다. 앙굴렘 만화 축제는 지금까지 세 번 정도 참여했는데 아주 아주 멋집니다!

주로 어린 독자층이 많은가요? 아니면 전 국민이 즐기는 모습인가요?

네. 연령대도 다양해요. 할머니 할아버지, 부모님, 자식들 다 각자 만화책을 들고 좋아하는 작가한테 줄을 서서 사인을 받아요. 작가와 소통도 되게 원활하고, 만화와 만화가를 대하는 자세도 너무 멋있더라고요. 예를 들면 프랑스에는 만화 원화를 사고 파는 문화가 있어요. 가격도 굉장히 높게 거래됩니다. 한국에서는 아직 만화 원고를 사고 파는 케이스가 적은 데 반해 프랑스는 만화만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큰 갤러리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저도 용기 내서 제 졸업 작품 <연어> 스케치를 보여드렸는데, 프로로 데뷔해도 될 것 같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일정의 마지막 즈음 슈퍼애니 대표님한테 말씀드렸죠. 꼭 프랑스에서 데뷔하겠다고요. 그 후 프랑스의 대형출판사 글레나(Glénat Editions)의 만화 코난(Conan)으로 데뷔를 했습니다.

<인체드로잉> 수업 중인 박재광 작가

무작정 따라간 프랑스 투어가 만화작가로서 시작하게 된 계기였군요. 노트폴리오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시작하게 된 이야기도 궁금하네요.

운이 좋았습니다. 원래 <인체드로잉> 수업을 진행하시던 김동호 작가님과 밥을 먹고 있었는데, 인체드로잉 수업을 그만두시고 잠깐 쉴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럼 “내가 할게. 나 소개해줘”라고 대답했어요. 당시 김동호 작가님은 제가 수업에 별생각이 없는 줄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이후 노트폴리오 대표님하고 밥을 먹으면서 제 인스타그램의 작업을 보여드렸습니다. 바로 오케이하셨어요. 그렇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일사천리로 노트폴리오와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운이 좋았다고 말씀하셨지만 단순히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아요. 수강생분들의 말을 빌려보자면 작가님의 수업이 정말 재밌다고 하더라고요. 또 수업 시간이 끝나도 수업을 하시는 열정도 대단하시다고요.

노트폴리오의 인체드로잉 수업은 수강생분들이 개인의 역량을 좀 올리기 위해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제가 보고 느꼈던 것들을 천천히 알려줄 수 있어요. 경험을 기반으로 얘기하고, 작업하면서 느꼈던 고민을 천천히 알려드리고 하다 보니 그런 점에 계속 수강하시는 게 아닐까 싶어요.

더불어 오래 수업을 할 수 있었던 건, 노트폴리오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 덕분인 것 같습니다. 제가 혼자 개인 수업을 했다면 어려운 부분이 있었을 텐데, 노트폴리오가 오래 활동했다 보니 다양한 연령대의 학생이 수강하시는 것 같아요.​

작가님 수업엔 정말 다양한 연령대의 수강생이 계시던데요. 작가 지망생부터 중년층까지! 디자인 관련 전공 학생들도 수강하시더라고요.

그러게요. 저를 모르고 오시는 분들도 많아요. 그래서 노트폴리오 덕분이에요. 제가 홍보하면 저를 아는 사람들 위주로만 올 텐데, 다양한 사람들이 오니까요.

취미를 넘어 그림을 업으로 택하는 수강생도 있을 텐데, 직업으로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메시지가 있다면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저는 항상 이 일을 오래 하고 싶다고 생각해요. 유명해지고 싶고 돈도 잘 벌고 싶지만, 결국에는 오래 하고 싶어요. 일생일업( 一生一業 )이라고 생각하면서, 계속 성장해 나갔으면 좋겠어요. 저는 그림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었고, 그림이 재밌고, 그림으로 유명해지고 싶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서 더 좋은 작품도 하고 싶고요. 나중에 도태되고 싶지도 않아요.

저는 더 나이 들어서도 계속 활동하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프랑스에서는 70대에도 활발히 활동하는 작가님들이 많이 계세요. 독자들과 소통도 꾸준히 하고 즐겁게 하시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서 그림은 단거리 싸움이 아니고 장거리 마라톤이라 생각하려고 합니다.

<청와대 2022년 신년 연하장> 작업

즐겁게, 오래도록! 그런데 많은 분이 침체기를 겪다가 포기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박재광 작가님은 어떻게 마인드 컨트롤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여러 방법이 있어요. 첫 번째 마인드 컨트롤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들을 하면서 가만히 있는 거예요. 제가 한 번은 주변 사람들이 미워질 정도로 바닥을 친 적이 있어요. 그때 김정기 작가님과 작업하시는 프랑스의 시나리오 작가님이 한국에 머무르면서 작업실에 자주 놀러 오셨는데, 그분이 보기에는 제가 상대적으로 한가해 보였나 봐요. 당장 작업 중인 일은 없어도, 당시 입시 학원 관련 일을 제가 모두 담당하고 있었는데, 굉장히 상처를 받았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소 단위의 일은 뭐가 있을까? 하고 고민했어요. 그림 그리는 것 말고는 없더라고요.

다음날부터 하루에 그림을 한 장씩 그려서 책상 위에 올려놓고 가고, 다음날에도 또 올려놓고 갔어요. 우연히 그 시나리오 작가님이 제 책상의 그림을 보게 됐는데, “이 그림 괜찮다, 마침 프랑스에 재밌는 프로젝트가 있는데 널 추천해도 될까?”라고 물어보셔서 “오브 콜스!”라고 답했죠. 그렇게 데뷔작 코난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매일 그리던 스케치 한 장이 제 인생을 바꾼 거죠. 바닥을 쳤다고 좌절한 상태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죠.

앞서 운이 좋아 프랑스에서 데뷔했다고 말씀하셨지만, 가장 힘들 때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군요.

네. 코난은 저에게 프랑스 데뷔작이기도 하지만,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 때문에 가장 의미 있는 작업이기도 해요. 또한 제가 앞으로 가져야 할 작가로서의 마음가짐을 정하게 해준 소중한 경험이었죠.

다른 마인드 컨트롤 방법은요?

두 번째 마인드 컨트롤은 “해낸다. 그리고 이미 해냈다. 무조건 할 수 있다”고 그냥 무조건 말하는 편이에요. 자기 암시 같은 거죠. 바쁠 때도 새로운 일이 들어오면 거절하지 않고 할 수 있다고 해요. 사실 요즘에 일이 많아요. 바쁜데도 새로운 일이 들어오면 거절하지 않습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마지막으로 창작자가 되고 싶은 분, 혹은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한 창작자분들에게 전하는 응원의 말이 있다면 한마디 부탁드릴게요.

인터뷰하다 보면 제가 뭐라도 된 것처럼 보일까 봐 좀 죄송스럽거든요. 선배라기보다는 같이 발버둥 치고 있는 사람의 응원이라고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 스타일대로 말하자면 오래 하십시오. 당장 결과가 안 보여도 말이죠. 저도 계속 발버둥 치고 있고 하루하루가 위태롭거든요. 그냥 조금씩,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겁니다. 여러분도 오래 하시면 저보다 더 빨리 성장하는 날도 올 겁니다. 자신만의 노력을 하다 보면 좋은 기회도 만나게 되니, 오래 하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명해지셔서 저를 기억해주세요. 그리고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맛있는 거 사주세요! (웃음) 감사합니다.

박재광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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